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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가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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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52회 작성일 20-01-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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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라인드 건설엔지니어

여자친구를 다시 만났다. 자기가 생각이 짧았노라 했다. 나랑 헤어지고 힘들어서 같이 근무하던 미혼 남선생과 만나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만한 사람이 없단다.

 

뜨겁게 눈물로 재회하고는 이어서 우리는 그 동안 못했던 사랑을 나눴다. 

안단테 포르테 아다지오 프레스토...

 

여자친구는 항상 그랬듯이 나를 꼭 껴안으며 나즈막히 사랑해.. 라고 말했다.

난 이상하게 사랑을 나누는 도중 여자친구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더..

 

"아이고 피곤했나보구만 어이 어이 김기사 일어나!"

 

어!?

 

눈을 뜨니 이빨은 많이 빠졌지만 그 누구보다 무전기 목소리는 우렁찼던 야간 경비 아저씨가 나를 깨웠다.

 

아.. 꿈이었구나.

 

"아유.. 바지가 이게 뭐야.. "

 

경비 아저씨는 나를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집에 갈꺼냐 아니면 사무실에서 있을꺼냐 물었다.

난 집에 간다고 하곤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그리고 방금 전 까지도 내 앞에서 아름다운 몸으로 나와 뜨겁게 사랑하던 여자친구의 모습이 또렷하게 생각났다.

 

아 조금만 더 늦게 깨우지.

 

주섬주섬 옷을 껴 입고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새벽 세시다.

집에서 부재중 전화가 세통이 와 있었다.

 

어제 이 시간에 기초를 치기 시작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게이트로 향하며 다시 한번 현장을 내려다봤다.

 

군데군데 켜진 투광등 사이로 얼룩덜룩한 돼지천막 끝자락이 파란 비닐천막을 삐져나와 살랑살랑 바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택시를 잡고 집에가니 다들 자고있고 몰래 바지를 벗어 비닐봉지에 넣어두고 내일 출근하면서 버리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들었다.

 

"어머 너 회사 안가니?"

 

평소에 혼자 일어나 출근을 하던지라 어련히 알아서 갔겠거니 하던 엄마가 아직 자고 있는 나를 깨운다.

 

억...

 

부리나케 준비를 하고 보니 일곱시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인턴 김기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기사 어제 내가 늦게 퇴근해서 아침에 좀 늦을거 같아. 공구장님께 말씀좀 잘 해드려 곧 갈께]

 

김기사는 알았다고 조심히 오라고 답변이 왔고 엄마몰래 어제 비닐봉지에 담아둔 공구리로 쩔은 바지를 가지고 나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택시를 탔다.

 

으 택시비만 이번주에 얼마가 깨지는거냐.

 

현장 게이트에 도착할 무렵 직원들이 티비엠을 끝내고 우르르 아침 먹으러 간다.

 

"기사님 여기말고 조 앞에 세워주세요"

 

멀찍히 내려 직원들이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난 종종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첫 지각이네. 이런적 없었는데.

 

사무실로 가 군장을 차고 현장을 나섰다. 늦은 주제에 아침을 먹기가 좀 미안하고 어제 기초 친 구간이 궁금했다.

 

인턴 김기사한테 전화가 왔다.

 

"선배님 아침 안드세요?"

 

"응. 현장 내려가고 있어."

 

"엇? 아까 김기사님 택시에서 내리는거 보고 김기사님 공기밥도 올려놨는데.."

 

"날 봤다고?"

 

"네 최대리님이 앗 김기사다! 해서 모두들 다 택시에서 내리는거 봤어요. ㅎㅎ"

 

"응 아냐 난 나중에 먹던가 할께."

 

이래서 내가 안전을 안 좋아해. 그런건 봐도 모른척 해야지 그걸...

 

속으로 투덜대며 현장으로 내려가서 보니 골조업체 직영 반장과 직영 두명이 어젯밤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보양천막을 재정돈 중이었다.

 

공구리를 친지 열두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굳어서 걸어다닐만 하다. 보양천막들 때문인지 딱딱한 바닥을 걷기보단 약간 부드러운 땅을 걷는 것 같다.

 

수화열 계측기는 반짝거리며 나 열심히 일 하고 있노라를 알렸고 넓은 파란 캔버스가 깔린 대지 위에서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건물이 언제쯤 저 위로 올라갈 수 있나.. 생각이 들었다.

 

안전교육장에 앉아서 믹스커피 한잔을 타 마시며 담배 한대를 피웠다. 믹스커피도 처음엔 입에 안맞아서 잘 안마셨는데 이젠 물처럼 마시네.

 

어제 잠깐 졸았던 꿈에 나타난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내가 고자도 아닌데 거진 반년동안 쓸쓸히 있었다는 현실이 좀 그랬다.

 

뭐 군대에서도 참았는데 그리고 뭐 내가 항상 그런거만 생각하는 놈도 아니고...

 

여자친구와 인턴 김기사가 오버랩되면서 아 나도 졸 외로운데 걍 확 사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로 가서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밥을 먹고 들어온다. 박차장은 나를 힐끗 보더니 오늘은 호구 멀쩡하네? 라며 안녕하세요 라는 나의 아침인사에 회답했다.

 

아 재섭서.

 

기초가 양생될 동안 일이 좀 줄어서 나름 루팡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공구 기초 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회식이다.

 

어스름이 깔리고 다들 소고기 집으로 향했다.

하하호호 웃고 즐기며 맛있게 먹었고 소주를 나눠 마셨다.

 

일차가 끝나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룸싸롱을 가려는데 인턴 김기사가 좀 취해서 깔깔거리고 있다.

 

임기사가 자기가 오늘 인턴 김기사를 집에 보내면서 집에 일찍 가겠노라 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둘이 멀어져 가는데 속에서 왠지 모를 질투가 셈솟아올랐다.

 

아씨.. 룸싸롱 포기하기엔 그렇고 인턴 바래다 주자니 그것도 글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룸싸롱을 가서 저번에 그랬듯이 간부 그리고 사원으로 나뉘어서 즐겁게 놀았다.

 

얼마만의 이 여자여자한 냄새인지.

 

용기를 내서 껴안고 부드러운 그곳도 슬쩍 만지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양주에 폭탄주에 점점 취해갔고 그렇게 자리가 파할무렵 박과장이 김기사 오늘 이차 가야지! 했다.

 

아 예!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빙빙 돈다.

 

내 파트너가 나를 부축하고 나왔는데 정신이 없다. 바닥은 자꾸 눈 앞으로 다가오고 난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집이다.

 

알람은 안 맞춰놔도 그리고 아무리 술에 취해도 아침이면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어제 어떻게 된거지.

 

침대 옆에는 여기저기 벗은 옷이 널부러져 있었고 잠깐 앉아서 기억을 되돌렸는데 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샤워를 하면서 보니 어제 이차를 안간 것 같다.

하.. 이제 술좀 많이 먹지 말아야지.

어떻게 온 기횐데 허무하게 날려버렸네.

 

출근을 하니 박과장이 어제 잘 들어갔냐 물었다.

 

탕비실로 박과장을 데리고 가서 물어보니

 

어제 내가 너무 취해서 갈지자로 걷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택시태워 보냈단다.

 

택시를 안타고 아니에요! 나 이차 가야해요! 안한지 오래됐단 말이에요!! 라고 혀꼬부라져서 크게 외쳐서 웃기면서도 민망했다 한다.

 

죄송하다 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인턴 김기사가 맘에 있니?"

 

박과장이 물었다.

 

"아뇨! 그냥 후배죠 뭐."

 

"아니던데?"

 

에..이건 또 뭐지.

 

박과장이 말하길 그게 아니면 인턴 김기사한테 데려다 달라고 했단다. 하 이거 참...

 

취해서 헛소리가 나왔나보죠 하곤 말았다.

 

그러고보니 앞으로 이주 후면 인턴 김기사의 인턴도 끝이다. 인턴 김기사는 내년 상반기 공채에 연계한 혜택을 마다한 채 지원 않기로 했다.

 

인턴 김기사가 간다고 하니 모두들 아쉬워했다.

그 누구보다 난 너무 아쉬웠다.

 

마치.. 마지막 참호를 독일군에게 뺐긴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으며 마지노선을 지키던 프랑스군의 심정이었고 여자친구가 통 연락이 없는걸로 보아 꿩대신 닭이라고 인턴 김기사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회사에 있을동안 사귀자고 할까 아니면 인턴 끝나고 시귀자고 할까.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인턴 김기사의 송별회도 잘 치뤘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

 

마지막 출근 날 인턴 김기사하고 짬을 내어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그 동안 고생했고 넌 정말 잘했노라 하며 아직 일년도 안된 기사놈이 마치 이십년 이상 경력이 있는 고참마냥 칭찬을 했고 넌 어딜가서든 잘 할거라 했다.

 

인턴 김기사는 쌩긋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앞으로도 저 웃음을 계속 보고 싶어서 말을 건냈다.

 

"김기사 저번에 우리 막걸리 마시면서 말한거.. 아직 유효한가?"

 

되도 않는 똥폼을 잡으며 말했다. 마치 내가 수락만 하면 사귀는 것처럼 오해를 한 채.

 

인턴 김기사는 어떤거요? 하더니 아... 했다.

 

"사실은요 그 날 이후로 많은 생각했어요."

 

조심스레 운을 뗀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뭐지? 임기사랑 사귀나? 저번에 그 둘이 데려다주는거 그거였나 뭐지?

 

"헤어진 오빠를 너무 못 잊겠어서 연락을 했고 다시는 바람피지 않겠노라 다짐받고 그 후로 사귀고 있어요."

 

아...

 

"그래 잘됐네. 축하한다."

 

하지만 내 맘 속은 영 복잡하고 크리스마스를 향한 모든 계획이 차질이 생겼으며 기름칠을 잔뜩 하고 빠르게 달리던 기차는 급브레이크를 잡고 힘없이 선로에 서 있었다.

 

이거 쭉 전진해서 저 터널 통과해야 하는데!!

 

"근데 한번 바람핀 사람은 그럴 경우가 또 있다는데 괜찮겠어..?"

 

되도않는 논리를 갖다대며 인턴 김기사를 쳐다봤다. 저 하얗고 동그란 눈.

 

"그러게요. 근데 뭐 제가 더 좋아하나봐요.."

 

인턴 김기사는 막걸리를 마시고 나를 좋아 한다더니 그건 새카맣게 잊었는지 저리 말한다.

 

하.. 기차는 한동안 궤도위에 서 있다가 다시 후진을 했다. 출발했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칙칙폭폭 거리며 후진을 하며 갔다.

 

"그래. 잘됐다. 그나저나 계속 건설일은 할꺼고..?"

 

그렇다 한다. 활동적인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계속 할거라 한다.

 

"그럼 그냥 여기 있는게 낫지 않아...?"

 

인턴 김기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즈막히 말했다.

 

그게 사실은.. 자기 아버지가 XX그룹의 임원이고 그 그룹의 건설사로 가기로 했다는거다. 아무래도 지금 회사보다는 자기가 임원으로 있는 회사 계열사로 오면 좀 더 낫지 않겠냐 해서 그런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그래 넌 거기도 합격하고 잘 할 수 있을꺼야."

 

초라해진 나는 그렇게 커피타임을 마무리 하고 다시 현장으로 왔다.

 

인턴 김기사는 하나씩 잡고 고마왔노라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소장님께 인사를 드리곤 그렇게 현장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고 남아있는 시커먼 직원들은 삼개월동안 꿈을 꾼 것처럼 인턴 김기사 바이러스에 걸려 모두들 오랫동안 아쉬워했다.

 

나 또한 그 동안의 감정을 내려놓은 채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쏠로가 되어 여전히 박차장에게 쫑끄를 먹으면서 일 하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규모가 커지고 일이 많아지다보니 신규 직원들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대리는 이공구로 오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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